사지(四知)는 후한서에 나오는 다음 글에서 유래한다.
天知地知子知我知 何謂無知 – 後漢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양진(楊震)이 왕밀의 뇌물을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심의위원의 마음 가짐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나왔다.
사지(四知)는 후한서에 나오는 다음 글에서 유래한다.
天知地知子知我知 何謂無知 – 後漢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양진(楊震)이 왕밀의 뇌물을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심의위원의 마음 가짐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나왔다.
요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왈가왈부 말이 많은가 보다.
그 와중에 눈여본 글을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특히, 나이 들어 읽은 사무엘서의 다윗은 굉장히 정치적이었다는 느낌까지 받았던 터라, 더 와닿은 기사라 인용했다.
출처 :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55
아마 이명박 대통령이 마음에 흠모하는 성서 내 정치인이 있다면 단연코 다윗일 것이다. 다윗은 정치적 역량이나 내적 성품이나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있어서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의 표준이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신앙에 투철한 이 대통령으로서는 다윗이 받았던 찬사,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행13:22)로 하나님과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하여 위기 때나 평안한 때에 국정을 총괄하는 이로서, 장로 대통령으로서 다윗을 자주 묵상할 것이라 미루어 짐작한다.
<중략>
이명박이 다윗이 아니고, 그래서 다윗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끊임없이 해하려고 했던 원수인 사울의 죽음을 무척이나 슬퍼했다. 슬픔을 억누르지 못해 옷을 찢고 온 종일 금식했다. 그리고 활의 노래라는 조가를 지어 영전에 바쳤다. “아, 용사들이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사무엘상 1:19)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라고 했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1:24)
<중략>
보수 기독교인들은 한술 더 뜬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의 방식인 자살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표명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한 없이 슬퍼하고 울어주는 반면, 무책임하다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비판의 말만 난무한다. 그냥 좀 울어주라. 마냥 슬퍼해 주라.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자살 논쟁 벌이지 말고, 그냥 죽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울어주면 안 되나? 이것이 이명박 대통령과 기독교인들이 다윗이 아니고, 다윗을 배워야 할 이유다.
둘째, 다윗은 사울을 제 손으로 죽였다는 아말렉 사람을 쳐 죽였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평소 사울과 다윗 사이의 관계를 잘 아는 이 사람은 사울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죽인 것으로 다윗에게 고해 큰 보상을 받을 요량이었다.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빗나갔고, 목숨마저 잃었다.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왕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사람인데, 감히 겁도 왕을 살해했느냐며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그때 다윗이 한 말은 다윗은 아말렉 사람의 보고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네가 죽는 것은 너의 탓이다. 네가 너의 입으로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분을 제가 죽였습니다’ 하고 너의 죄를 시인하였다.”(1:16, 표준새번역) 사울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죽음을 결심할 만한 사람이 아니며, 왕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으로 제 스스로 생명을 끊었을 것이라는 점은 다윗은 알았고, 아니면 적어도 그러하기를 다윗은 바랐던 거다.
다윗의 이런 행동은 영적이면서도 정치적이다. 영적이라 함은 하나님이 세운 왕을 사람이 폐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세우고 폐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에게 있기에 감히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에 대한 다윗의 헌신이다. 정치적이라 함은 사울을 지지했던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을 몹시 싫어했을 다윗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를 것이라는 세간의 짐작을 일거에 뒤집고 다윗에 대한 신뢰를 증대하는 기회로 삼았다.
<중략>
몇몇 신학자들은 다윗의 행동의 행간을 지독한 정치적 계산과 노림수로 해석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골리앗을 한 방에 넘어뜨린 명장이 미친 척하여 사람을 속일 수 있었으니 실로 다윗은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윗의 노래와 통치 행위 면면에 숨어 있는 왕으로서의 정치적 실익을 챙기는 모습에는 신앙의 진정성과 인격성이 같이 한다. 정말로 사울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걸로 그는 권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왕이다. 그랬기에 그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왕이었다.
<이하 생략>
동천년노항장곡(桐千年老恒藏曲)이요,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
월도천휴여본질(月到千虧餘本質)이요,
유경백별우신지(柳經百別又新枝)라.
– 象村 신흠(申欽·1566~1628)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신앙은 벡터라는 생각이 든다. (모르긴 몰라도 공학도의 사고방식이라고 치부할 것이리라.)
그럼 어떤 공간 속에서 표시되는 벡터일까?
신앙의 위치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창세기에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물음에서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4:9
이 두 물음에 답을 하면 나의 현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는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 속의 위치와 형제,자매 혹은 이웃과의 관계 속의 위치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신앙은 그 위치로만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바도 함께 나타난다.
하나님과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자체가 매우 불경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성서에는 감히 하나님과 비교해놓은 것이 있다. 바로 재물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그럼 이웃은 어떤가?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눅 6:32)
….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눅 6:35)
흔히 말하는 3D업종은 ‘디럽고(dirty)’, ‘디게 힘들고(difficult)’, ‘디게 위험한(dangerous)’ 일이다.
그런데, 요즘 이것보다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디게 꿈없는(dreamless)’ 일이란다. 일명 4D 직종인 것이다.
소프트업계 개발자들은 스스로를 4D인생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한다. 사람들이 기피한다는 3D(Dirty·Dangerous·Difficult)에 꿈을 잃었다는 뜻으로 ‘Dreamless’를 추가했다.
출처 : 매일경제
꿈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고, 3D를 뚫고 나갈 힘이다. 이게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3K라고 한단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공계를 두고 ‘3K’라고 부르며 기피한다. ‘위험(きけん), 고되다(きつい), 더럽다(きたない)’의 첫 글자인 ‘き(ki)’의 발음을 가지고 만든 용어다.
출처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