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다산의 제자 이강회

아래의 글은 남양주의 학습자료실에서 찾은 것입니다.
출처 : 남양주 다산 정약용 학습자료실

이강회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에 가르친 제자였다. 다산이 형 정약전에게 쓴 편지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다산이 < 논어고금주>를 저술할 때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스승이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간 그해에 우이도에 들어가는데 왜 갔을까?

우선 우이도의 ‘문순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문순득은 자기 배로 홍어를 무역하러 떠났다가 표류를 당했던 사람이다. 그는 표류하여 필리핀에까지 갔다가 중국대륙을 돌아 압록강을 건너 고향에 돌아왔다. 3년만의 귀향이었다. 당시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정약전이 그를 캐물어 이미 < 표해시말>이라는 기록을 남겼었다. 이강회는 문순득을 만나 무엇보다 문순득이 필리핀에서 보았던 서양선박에 관심을 갖고 캐묻는다. 그리하여 남긴 기록이 < 운곡선설>이다. 이에 덧붙여 육상의 교통수단인 수레를 주제로 한 < 차설답객난>이라는 글을 쓰고, 정약전이 남긴 < 표해시말>을 한데 묶어 < 유암총서>라는 책을 남긴다.

이강회는 또한 때마침 이곳에 표류해 온 중국인 ‘스홍량’을 신문하는 일에 참가하고서 < 현주만록>을 남긴다. 이 글에서 이강회는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해양국이라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과 항해기술에 대한 그의 관심이 분명히 드러난다.

한편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제주도 사람 김익강을 만나 < 상찬계시말>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이 글을 통해 제주도 이속들이 상찬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백성을 탐학했던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김익강은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영웅적 저항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이강회의 민생현실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기는 바다로부터 왔다. 바다에 대한 관심은 기술에 대한 각성이었고 국방에 대한 대비였다. 이미 정약용이 쓴 < 민보의>와 같은 책에서 나타나듯, 바로 스승의 관심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민(民)에 대한 후생과 안위에 대한 관심이다. 임형택 교수는 실학을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적 조류에 대한 사상적 각성의 산물로 보고 있다. 이강회를 통해 ‘다산학단’에서 해양으로 학문과 지식이 열리고 있었음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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