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성품이 본래 용우(庸愚)하고 견문이 고루(孤陋)하며,
재주가 쓸 만한 구석이 없고 행실이 빼어난 것도 없는데, 태종 전하를 만나 잘못
기용(起用)되었으나, 실오라기나 털끝만한 조그만 보필(補弼)도 없이 겨우 몽롱하다는 비난만을 면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명(聖明)하신
전하를 섬기기에 이르러서는 재보(宰輔)의 지위를 하게 되었으나, 본래부터 배운 것도 없는 데다가
노쇠(老衰)까지 하여 아무런 함이 없으므로, 항상 복속(覆餗)의 근심을 품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오니, 죄역(罪逆)이 심중하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상을 당한 지〉 1백 일도 못되어 동궁께서 명나라의 조정에 들어가 조근(朝覲)하게 되자 거상(居喪) 중인데도 신을 기용하여 모시고 가라고
명하였습니다. 신이 상주로서의 예제(禮制)를 마치게 해 달라고 두세 번 간청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며, 조현(朝見)할 기일이 박두하고 굳이
사양하여도 용납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고 바야흐로 행장을 차리는데, 조정에서 조칙(詔勅)으로 조현을
정지시켜 왔으므로, 상가(喪家)로 돌아가 대소상(大小祥)과 담제(禫祭)를 마치기를 청하였으나, 또한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론(公論)에, 영화(榮華)를 탐내어 상기(喪期)를 단축하여 예제(禮制)를 훼손하고 풍속에 누(累)를 끼치고도 부끄러워함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하여 죄를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뜬소문으로 탄핵(彈劾)을 받게 되었으나, 다행히 〈전하의〉 일월 같은 밝으심을 힘입어 무함(誣陷)과
허망(虛妄)을 변명해서 밝힐 수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의심을 조금이나마 풀게 되고, 그대로 계속 출사하라고 명하시니, 은혜가 지극히
우악(優渥)하십니다. 신은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책임(責任)이 중대한데 품은 계책이 없다면, 곧 비방을 초래하게 되고 화를 자취(自取)하게
되는 것은 사세(事勢)의 당연한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신의 평소의 행동이 이미 남에게 신임을 받기에 부족하면서도 지위가 신하로서 지극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으로 인하여 누(累)가 사헌부에 미쳤으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깊이 스스로 부끄러워합니다. 신이 비록
탐욕(貪慾)스럽고 암매(暗昧)한들 어찌 장오(贓汚)의 죄명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마음 속으로 겸연쩍어서 조정의 반열에 서기가 낯이
뜨거운데, 〈일국이〉 모두 바라보고 있는 자리에 즐겨 나갈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말할 수 없는 노쇠함을 살피시고,
신의 감당하기 어려운 중임(重任)을 가엾게 여기시사 신을 한산인(閑散人)으로 돌아가게 하여 길이 성택(聖澤)에 젖게 해 주신다면 참으로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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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비답(批答)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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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로는, 보상(輔相)은 중(重)하나니, 국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까닭이다. 인재를 얻기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경은 세상을 다스려 이끌 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지니고 있도다. 모책(謀策)은 일만 가지 사무를 종합하기에 넉넉하고, 덕망은 모든 관료의 사표가 되기에 족하도다. 아버님이 신임하신 바이며,
과인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바로서, 정승되기를 명하였더니 진실로 온 나라의 첨시(瞻視)하는 바에 부응(副應)하였도다. 전번에 세자가 조현하러 갈
때에 때마침 경은 상중에 있는 때이었으나, 국사에 관계하는 중신에게는 기복출사(起復出仕)하게 하는 성헌(成憲)이 있는 까닭에, 억지로
애절(哀切)해 하는 정을 빼앗고, 조호(調護)의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권도(權道)에 좇아 최복을 벗는 것은 이미 옛사람이 행한 것이다. 상기를
단축하고 길복을 입은 것에 대하여 어찌 세상의 논란이 감히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때로부터 〈경이〉 사직하겠다는 청이 비록 간절하였으나,
책임과 촉망이 더욱 깊었도다. 묘당(廟堂)에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이면 경은 곧 시귀(蓍龜)이었고, 정사와 형벌을 의논할 때이면 경은 곧
권형(權衡)이었으니, 모든 그때그때의 시책은 다 경의 보필(輔弼)에 의지하였도다. 이제 어찌
뜬소문 때문에 갑자기 대신의 임무를 사퇴하려 하는가. 내가 이미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도, 경은 어찌 그다지도 개의(介意)하고
심려(心慮)하는가. 과인이 〈경에게〉 책임을 맡기고 성취를 요구하는 뜻에 매우 어긋나도다. 더군다나 경은 아직 늙어서 혼모한 나이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성만(盛滿)의 직위를 근심하는가. 쓰고 단 약[辛甘]을 조제(調劑)하는 방도(方途)로, 옳은 것을 헌의(獻議)하고 불가(不可)한
것을 중지하게 하는 충성을 마땅히 더하여 미치지 못한 것을 번갈아 가며 닦아서 길이 끝없는 〈국운을〉 보전하려는 것이 나의 바라는 바이다.
혹시나마 굳이 사양하는 일이 없이 급히 직위(職位)에 나아가도록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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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황희가 즉시 대궐에 나아가 굳게 사양하여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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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본래 어둡고 어리석으며 또 이제는 귀가 먹어서 관직에
있는 것이 온당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뜬소문 때문에 사퇴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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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 쇠로(衰老)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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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는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얼자(孽子)이었다. 김익정(金益精)과
더불어 서로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黃金)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황희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奴婢)를
물려 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刑獄)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 그가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의논하거나 혹은 고문(顧問)에
대답하는 등과 같을 때에는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의논하는 것이 다 사리에 맞아서 조금도 틀리거나 잘못됨이 없으므로, 임금에게 무겁게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심술(心術)은 바르지 아니하니, 혹시 자기에게 거스리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하였다. 박용의 아내가 말[馬]을 뇌물로 주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일은 본래 허언(虛言)이 아니다. 임금이 대신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의금부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추국한 것이고, 대원(臺員)들이 거짓 복죄(服罪)한 것이다. 임금이 옳고 그른 것을 밝게 알고
있었으므로 또한 대원들을 죄주지 않고, 혹은 좌천시키고 혹은 고쳐 임명하기도 하였다. 만약에 정말로 박천기(朴天己)가 공술하지도 아니한 말을 강제로 〈헌부에서〉 초사를 받았다면 대원의 죄가 이와 같은 것에만
그쳤을 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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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인물(人物)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 *윤리(倫理) / *정론-간쟁(諫諍) /
*풍속-예속(禮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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